지적재산권 보호 문제로 RMI 공개 꺼리는 제조사
문제 풀어나갈 정부 부처 애매, '적임자 찾기'부터 난항
[녹색경제신문 = 김지윤 기자] 국내 전기차 보급률이 높아지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제대로 된 정비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일반 정비소도 전기차를 정비할 수 있도록 제조사가 RMI를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전기차는 제조사의 공식 서비스센터에서만 정비를 받고 있는데, 앞으로 전기차 보급률이 늘면 일반 정비소도 전기차를 수리할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돼야 하기 때문이다.
RMI란 차량 제조사가 제공하는 정비 매뉴얼, 진단 절차,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방법, 배선도, 전기 회로도 등의 기술 자료를 말한다.
내연기관은 물리 기계 수리 중심이기 떄문에 제조사의 RMI 없이도 정비가 가능했다. 반면 전기차의 경우 배터리팩의 절연 상태, 고전압 차단 절차, BMS 리셋 절차 등 RMI 없이는 진행 불가한 수리 항목들이 주가 된다. 특히 OTA 업데이트 이후에는 소프트웨어 변경에 따라 정비 방식도 달라지므로, 최신 RMI 확보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는 제조사들이 RMI를 공개하지 않거나, 일반 정비소에서 사용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비용을 요구하며 현실적으로 정보 접근이 제한돼 있는 상황이다.
유럽의 경우 제조사가 모든 독립 정비업체에 RMI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으며, 미국도 통합 포털을 통해 정비업체들이 RMI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조성해놨다.
▲ 지적재산권 침해 우려하는 제조사... 제도 정착 과정에서 잡음 불가피
지난 7월 31일 국회에서는 '미래차 정비제도와 교육체계 혁신방안'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전기차 정비를 위해서는 제조사가 RMI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제였다. 이 같은 논의는 3년 전 부터 이어져 왔으며 올해 같은 주제로 벌써 두 번의 공청회와 세미나가 열렸다.
이처럼 반복적으로 같은 주제가 논의되고 있음에도 제도 개선이 어려운 이유는 제조사의 지적 재산권 문제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김기택 한국자동차모빌리티협회 상무는 "RMI를 공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구체적인 정보 공개 범위에 대한 논의가 없다. 유료와 무료 정보의 범위도 정해야 하고 또 사이버 보안에 대한 문제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RMI가 자동차의 핵심 정보를 모두 담고 있는 만큼, 제조사 입장에서는 공적인 이익만을 위해 이를 모두 공개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금전적 이익은 고사하더라도, 타 제조사의 기술 침해와 자동차에 대한 사이버 공격 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임상일 한국자동차전문정비사업조합 정책위 의장은 "유럽과 미국도 RMI를 공개하고 있지만 전용 플랫폼을 구축해서 보안 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방법은 있고, 업계와 정부가 이걸 추진해나갈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임 의장은 "현재 국내 전기차 정비업계는 지원이 너무도 부족하다. 국내에 들어와있는 업체들이 정보제공을 해주지 않다보니 우리는 중국에서 자료와 교육을 제공받아 그걸 조합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정하는 것부터 난관
제조사의 지적 재산권 보호에 대한 문제는 있지만 결국 유럽과 미국처럼 RMI 공개 수순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김도년 한국소비자원 연구위원은 "전기차는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다.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구매하고 이걸 가까운 위치의 정비소에서 안전하게 수리받을 권리가 있다"며 "만약 국내에서는 RMI가 공개되지 않아 일반 정비소에서는 전기차 수리를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소비자 권리 침해 행위"라고 말했다.
글로벌 검사 인증 기관인 린랜드(TUV Rheinland)의 서상훈 팀장은 "전기차 정비는 정말 위험하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단 몇 초 사이에 정비사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관련 중대재해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라며 "전기차 수리 정보를 오픈하는 것은 잘 수리된 차를 탈 소비자의 권리와 안전하게 일할 정비사의 안전권이 결부된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지난한 과정을 누가 주도해 이끌어나갈 것인지, 책임의 주체를 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국내에서는 RMI 제공 플랫폼 및 제공 기기가 제조사 별로 다르고, 서로 호환이 되지 않는다. 정비소에서 다양한 차종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각 제조사 별로 판매하는 플랫폼을 구매해야 하는데, 가격 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반면 유럽과 미국은 통합 RMI 제공 플랫폼이 있어, 정비소들은 하나의 플랫폼만 구독해도 대부분의 제조사의 RMI를 열람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이처럼 제조사들이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보안 기능을 갖춘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세미나에 참석한 박원덕 한국교통안전공단 첨단연구개발처 처장은 "지금 자동차 관리법에서는 정보제공을 하도록 돼 있는데, 정비업체에서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쓸수가 없다. 그 정보를 프로그램으로 가공하고, 해킹 방지까지 해서 줘야 한다"며 "그런데 그걸 누가 핸들링할 것인가가 문제다. 정비업체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걸 할 수가 없다. 이걸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담당할 정부 부처도 애매하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그나마 가장 현 안건에 근접해 있는 부처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정비보다는 챠랑 제조와 출시 전 검사를 하는 기관이다. 제조사와 정비업계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고, 신뢰할 수 있는 프로그램 제작까지 총괄하는 등, 복잡하고 첨예한 문제가 결부돼 있어 적임자를 찾는 과정이 지난할 것으로 보인다.
김지윤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