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차세대 칩도 HBM 사양 조정 검토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AI 반도체 시장의 ‘갑’으로 불리던 엔비디아가 메모리 가격 급등에 결국 서버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계의 가격 협상력이 한층 강화되는 모양새다. AI 서버 원가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자 메모리 가격이 완제품 가격까지 좌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내년 초 출하되는 AI 서버 가격을 올해보다 최대 15% 인상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베라 루빈’과 현재 주력인 ‘그레이스 블랙웰’ 기반 시스템이 대상이다.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서버 원가 부담이 커진 만큼 최종 가격에 이를 전가해 수익성을 방어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의 서버 가격 인상이 메모리 업체와 고객사 간 가격 협상력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 AI 서버 원가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메모리 가격이 서버 가격과 수익성까지 좌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엔비디아와 글로벌 빅테크가 AI 반도체 수요를 앞세워 부품 가격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다면, 현재는 HBM 공급 부족을 배경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의 협상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메모리가 AI 서버 매출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50% 초반에서 약 66% 수준까지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서버 한 대에 탑재되는 HBM 물량이 늘어난 데다 HBM3E에서 HBM4로 세대가 전환되면서 메모리 단가 자체도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서버 가격을 15%가량 올린 것도 메모리 원가 상승분을 반영해 기존 수준의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차세대 AI 가속기로 갈수록 메모리 탑재량이 늘어나는 점도 가격 상승을 뒷받침하는 요인이다. HBM 적층 단수가 8단에서 12단으로 높아지면서 가속기 한 개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커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AI 서버 전체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용 부담도 확대되고 있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지속되면서 AI 반도체 업체가 메모리 사양을 조정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칩 ‘루빈 울트라’의 HBM 사양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엔비디아가 올해 상반기까지 루빈 울트라의 기본 설계를 12단 HBM4E로 유지했지만, 올해 3분기 초부터 HBM 사양을 낮춘 대안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HBM 가격 상승이 차세대 AI 칩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메모리 공급 제약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제한된 웨이퍼 생산능력을 HBM 등 AI용 고성능 메모리에 우선 배정하면서 범용 메모리까지 공급 여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맞물려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반면 단기간에 공급을 늘리기는 어려운 만큼, 메모리 업체들의 가격 협상력은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메모리 가격 상승이 장기화될 경우 AI 인프라 투자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AI 서버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면 구글·아마존·메타 등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의 설비투자 비용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이다. 빅테크들이 자체 AI 칩 개발을 확대하면서 HBM 수요처가 늘고 있지만, AI 인프라 구축 비용이 계속 높아질 경우 향후 투자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AI 서버의 고성능화로 HBM 탑재량이 늘어나면서 메모리가 서버 원가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며 “단기적으로는 메모리 업체들이 가격 협상에서 우위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지만, 장기적으로는 AI 인프라 투자수익률과 빅테크의 투자 지속 여부가 메모리 수요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창현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