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거래 대신 장기공급계약 확산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2027년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예정 물량이 사실상 모두 고객사에 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빅테크들이 수년 뒤 필요한 메모리까지 미리 확보하고 있는 가운데, 장기공급계약(LTA)이 메모리 산업의 새로운 거래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2027년 예상 D램 및 HBM 생산 물량은 대부분 고객사에 배정됐으며, 고객사들은 희망 물량의 약 60~70% 수준만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공급 가격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이처럼 메모리 물량이 미리 배정된 이유는 AI 서버 투자 확대에 따른 메모리 수요가 공급 능력을 앞지르고 있는 시장 구조의 영향이 크다. HBM은 물론 일반 D램까지 공급이 빠듯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고객사들이 필요한 시점에 제품을 구매하는 대신 수년 전부터 생산 물량을 선점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는 모양새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례가 메모리 산업의 거래 관행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보고 있다. 과거 메모리 시장은 분기 단위 계약과 스팟 거래 비중이 높았다. 시황에 따라 가격이 크게 변하는 특성상 장기 계약보다는 시장 가격에 맞춰 거래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안정적인 공급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특히 HBM은 증설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데다 첨단 패키징 능력까지 함께 확보해야 하는 만큼 필요한 시점에 원하는 물량을 조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같은 변화 속에서 LTA가 AI 메모리 시장의 '뉴노멀'로 자리 잡고 있다. 업계에서는 HBM에서 시작된 LTA가 일반 D램으로까지 확대되면서 향후 메모리 거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최근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약 10개 고객사와 LTA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계약은 기본적으로 5년 단위로 체결되며, 선수금과 가격 변동 대응 장치 등을 포함해 공급 안정성을 높이는 구조다.
삼성전자 역시 글로벌 상위 5개 데이터센터 고객과 LTA를 이미 체결했으며, AI 관련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 5개 주요 고객과도 최종 협상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론도 최근 16개 고객사와 3~5년 단위 장기공급계약(SCA)을 체결했다. 계약이 체결된 물량은 전체 D램 판매량의 약 20%, 낸드 판매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LTA 확대가 대규모 설비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기간 확보된 수요를 바탕으로 생산능력 확대에 대한 투자 부담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메모리 3사는 일제히 생산능력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국내 평택캠퍼스와 천안·온양을 중심으로 HBM과 첨단 D램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올해 청주 M15X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패키징 시설(P&T7)과 관련한 자본지출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마이크론도 2035년까지 250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뉴욕·아이다호에 생산기지를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시대 메모리는 필요한 시점에 구매하는 제품이 아니라 수년 전에 생산 물량을 미리 예약하는 자원이 되고 있다"며 "LTA가 일시적인 공급 부족에 대응하는 계약이 아니라 AI 메모리 시장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정창현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