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 내 위상 급변하며 ‘생산자 중심 시장’ 장악
노후 전력망·AI 데이터센터·신재생 에너지 ‘3박자 호재’에 영업이익률 20% 돌파
장기 성장을 위한 인력문제·사법 리스크 해결은 과제로
[녹색경제신문 = 박성진 기자]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전력 시장의 변방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던 한국산 변압기가 이제는 전 세계 인프라 시장의 주도권을 쥔 ‘슈퍼 을(乙)’로 올라섰다. 과거 ABB, 지멘스, GE, 슈나이더 등 이른바 글로벌 ‘빅4’의 위세에 눌려 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미국 유수의 전력 회사들이 한국 기업을 직접 찾아와 물량 확보를 간청하는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는 국내 최대 전기산업 전시회인 ‘일렉스 코리아’ 현장에서 확인된 K-전력기기 위상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국내 주요 전력기기 업체들의 부스는 유례없는 호황이 가져다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 시장 진출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미국 내 공장을 설립해 관세면제나 세액공제 인센티브를 받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런 혜택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더라도 이익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생산자 중심 시장’이 형성됐다”고 현 상황을 귀띔했다.
이러한 K-전력기기 열풍의 배경에는 이른바 ‘3박자 호재’가 완벽하게 맞물려 있다. 우선, 북미 시장의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다. 현재 미국 내 전력망의 70% 이상이 설치된 지 25년을 넘어선 노후 장비로 구성돼 있어,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한 인프라 전면 교체가 시급한 상황이다. 여기에 인공지능 산업의 폭발적 성장에 따른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 탈탄소 정책에 따른 신재생 에너지 확대가 맞물리면서 전력기기 수요를 기록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K-전력기기의 높아진 위상은 구체적인 수치로 증명된다. 국내 주요 전력기기 업체들의 수주 잔고는 이미 5년 치를 가득 채웠고, 현재 주문을 넣어도 물건을 인도받기까지는 최소 3년에서 5년을 대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국내 기업들도 이런 호황을 바탕으로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써냈다. HD현대일렉트릭은 매출 4조 795억 원과 영업이익 9,953억 원을 기록하며 매출 4조 원 시대를 여는 동시에 영업이익 1조 원 클럽 입성을 눈앞에 뒀다. 효성중공업은 중공업 부문의 폭발적인 판매 성장에 힘입어 매출 5조 9,685억 원, 영업이익 7,470억 원을 기록했는데,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100% 이상 급증한 수치다.
LS일렉트릭은 배전 기기와 초고압 변압기의 고른 성장을 바탕으로 매출 4조 9,622억 원, 영업이익 4,269억 원을 달성하며 북미 매출 1조 원 돌파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일진전기 역시 초고압 변압기와 전선 부문의 수주 호조를 이어가며 조 단위의 수주 잔고를 확보하는 등 탄탄한 성장세를 증명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K-전력기기 전성기가 최소 2030년까지 이어질 ‘구조적 호황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장밋빛 전망 뒤 장기 성장을 위해선 업계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와 리스크도 여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아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여전히 관세는 수익성에 잠재적 부담을 미친다. 전력기기 수출을 많이 하는 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언급했다.
또한, 초고압 변압기와 같은 제품은 고도의 숙련공이 필요한 '수제품' 성격이 강해 자동화가 어렵고 베테랑 육성에만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현재 제조와 시공 현장 인력의 대부분이 50대 이상 고령화 비율이 높아 인력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보다 직접적인 리스크는 국내외에서 제기된 사법 및 행정 리스크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생필품 및 주요 산업 전반의 담합 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과 부당이익 환수, 제도 보완을 지시한 상황에서 업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력이 제기한 약 1,70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과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처분 결과에 따라, 입찰 참가 제한이나 막대한 배상금 지출이 현실화되면 호황에 일정부분 타격은 피할 수 없다.
업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결국 현재의 수퍼 사이클을 이끌어 가는 것은 기업들의 혁신 역량에 달려 있다. 지금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차세대 기술개발 등을 통해 시장 확대와 난관 돌파에 도전해야 성장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박성진 기자 pol@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