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상·하나손보·한화손보, 차별화된 D&O 상품 개발로 수요 대비
- 글로벌 67조원 시장 진입 가능성과 제도적 한계 공존
[녹색경제신문 = 나아영 기자] 상법 개정 기대감이 임원 배상책임보험(D&O) 시장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삼성·현대·메리츠·KB·한화 등 주요 보험사들이 D&O 상품 강화에 나서는 가운데, 미국·영국 대비 걸음마 수준에 머물렀던 국내 D&O 시장이 글로벌 67조원 규모 진입을 노려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보험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17일 김병기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상법 개정안을 민생 법안 중 가장 먼저 처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법 개정 입법 일정이 가시화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주요 공약인 '코스피 5000' 실현을 위한 핵심 법안으로 상법 개정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18일에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개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포럼은 "상법 개정→기업가치제고→주가 상승→경제심리회복의 선순환을 재계는 왜 반대하는가"라며 4대 그룹 경영진의 주주 사과를 촉구해 개정 추진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이러한 정치적 추진력에 힘입어 새 개정안은 기존 이사 충실의무 확대·전자주주총회 의무화에 더해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집중투표제 강화 등을 추가했다. 특히 유예기간 없이 즉시 시행하도록 해 임원 피소 급증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보험업계는 D&O 수요 폭증에 대비한 상품 개발과 영업 강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국내 D&O 시장은 이미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보험개발원 집계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의 D&O 계약 건수는 2013년 200건에서 2023년 1645건으로 10년 새 8.2배 급증했다. 같은 기간 수입보험료는 283억원에서 562억원으로 2배, 지급보험금은 34억원에서 155억원으로 4.6배 늘어나면서 시장 확장세가 체감될 정도로 뚜렷해졌다. 여기에 상법 개정까지 더해지면 임원 피소가 급증하면서 이 같은 성장세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험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과 견주면 국내 D&O 시장의 성장 잠재력은 더욱 눈에 띈다. 한국ESG기준원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D&O 시장은 2014년 132억달러에서 2023년 252억달러(약 35조원)까지 9년 만에 약 2배 커졌다. 연평균 9.9%씩 성장해 2030년에는 488억달러(약 67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한국도 이 흐름에 편승할 기회를 맞았다는 평가다.
하지만 국내는 아직 제도적 기반이 미약한 상태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이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D&O 가입을 유도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가이드라인 수준의 권고에 그치고 있다. 정부 차원의 D&O 규정도 2005년 금융감독원의 '상장법인의 D&O 가입에 관한 가이드라인'과 2023년 금융위원회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 개정이 전부에 불과하다.
이런 제도적 한계는 필연적으로 상품 개발 역량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D&O 약관이 미국 보험사 처브(Chubb)나 AIG 등의 영문 약관을 단순히 번역해 사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약관 해석의 불명확성이 발생하고,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분쟁도 빈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들은 상법 개정을 계기로 기존 D&O 상품의 차별화에 새롭게 나서고 있다. 현대해상은 최근 공시 누락, 관계기관 인허가 보고 실수, 직원 부당해고 소송에서 지적된 경영진의 부적절한 지시 등을 새로 보장하는 상품을 선보였다. 한화손해보험도 임원의 직무 위반뿐 아니라 태만, 과실, 허위 진술, 실수 등에 의한 손해배상까지 지원하는 보장 범위 확대에 나섰다.
여기에 하나손해보험은 회사가 임원의 재판 관련 비용을 보상하지 않을 경우 임원 개인에게 직접 보상하고 조사·조정 비용 등 소송 관련 실비도 제공하는 차별화 전략을 새롭게 도입했다. 메리츠화재 역시 임원이 손해를 방지하거나 경감하는 데 사용한 비용까지 보장 범위에 포함하는 특약을 추가하며, 경쟁에 동참했다.
한편, 금융사들은 이미 튼튼한 D&O 방어막을 갖춰놓은 상태다. KB금융의 D&O 보장한도가 950억원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며, 연 보험료는 105억원에 달한다. 신한·하나·우리금융도 보장한도가 500억원 수준으로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이들 금융그룹은 자회사 임원을 모두 포함하는 방식으로 D&O에 일괄 가입해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상장사들에도 확산되고 있다. 금융당국 통계에 따르면 상장사의 D&O 가입 비중은 2010년 21%에서 2023년 75%까지 급증했다.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계기로 비상장사들도 D&O 가입을 늘리는 추세를 보이며 시장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증권업계는 이러한 상법 개정 움직임을 반가워하는 분위기다. JP모건은 상법 개정 통과 시 1년 내 코스피 3200 돌파가 가능하다며 한국 증시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로 상향 조정했다. 외국인 보유 비중이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인 30%까지 하락한 상황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로 외국인 자금 유입을 기대한다고 분석한다.
다만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경제단체 간담회에서 "규제 합리화 문제에 주력한다"고 언급한 만큼 개정안 수위 조절 가능성도 변수로 남아있다. 이에 보험업계는 상법 개정 추진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면서 단계적 대응 전략을 수립하며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는 D&O 계약을 제대로 설계·관리할 경험이나 통계가 부족해 대부분이 재보험으로 출재되는 상황"이라며 "D&O는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인 만큼, 제도적 기반과 함께 보험사의 자체 상품 역량도 함께 키워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상법 개정을 계기로 국내 D&O 시장이 글로벌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는 것이 보험업계 중론이다. 업계에서는 단순한 '사고 후 보상' 모델을 넘어 '사전 예방 컨설팅'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종합 리스크 관리 솔루션으로의 진화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특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클레임 증가, 사이버 보안 리스크 확대 등 새로운 위험 요소들이 D&O 시장 성장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험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나아영 기자 financial@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