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순간’이란 무엇인가. 한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선대의 말 한마디가 웅장한 울림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 또는 사소한 이벤트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별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기업인에게도 별의 순간이 있다. 이 별의 순간은 기업인 개인의 운명은 물론 국가미래까지 변화시키는 ‘터닝 포인트’다. 산업을 재편하고, 일반인의 일상과 사회의 미래까지 바꾸는 거대한 수레바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별의 순간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 회장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애플의 아이폰을 보고는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카카오톡을 창업한다. 단순한 생각이 그에게는 카카오를 국민 메신저로 자리잡게 하는 터닝 포인트였다.
<녹색경제신문>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요 기업인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오늘 그들의 성공을 가져온 터닝 포인트와 위기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 등을 다루는 ‘CEO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註(주)]
배재훈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HMM의 대표이사직을 맡아 한국 해운재건을 이끌고 있다. 초대형선 20척과 함께 찾아 온 해상운임 급등으로 인해 지난해와 올해 HMM은 길었던 치킨게임을 끝내고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다.
해운업의 사이클이 통상 5~10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HMM이 해운재건 목표대로 세계 5위권의 입지를 갖추는 데는 배 대표의 역할이 클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지금 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예상치 못했던 초호황에 최대주주인 KDB산업은행(회장 이동걸)과 공기업인 해양진흥공사(사장 황호선)는 조력자가 아니라 상전 노릇을 하고 있다.
임기는 몇달 남지 않았고,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그가 어디까지 HMM을 선단을 이끌 수 있을 지 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터닝포인트
럭키금성상사 평사원으로 시작해 범한판토스 대표로 해운을 배우다
배재훈 대표는 1983년 럭키금성상사(LG상사의 전신)에 입사해 뉴욕법인에서 근무했다. LG반도체(SK하이닉스 전신) 미주지역 법인장 상무를 거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LG전자 MC해외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거쳐 2010년부터 2016년까지 6년간 LG그룹의 종합물류회사인 범한판토스(현 LX판토스)의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2014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물류위원장에 선임됐다.
이후 우송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2019년 3월 현대상선(HMM의 전신)의 대표이사를 맡아 현재까지 HMM을 이끌고 있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다양한 경험을 거친 만큼 그는 폭넓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일찍부터 해외영업통이었기 때문에 해외고객이 많은 HMM에는 준비된 경영자였던 셈이다.
또한, 그는 평소 ‘유연한 조직문화’와 ‘현장의 재량권 강화’를 강조하는 경영자로 잘 알려져있다. HMM직원들이 위기를 돌파하는데 힘을 합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문제라면, 내부적으로는 유연한 조직을 만들었는데, 법정관리를 맡고 있는 산은과 해진공은 '갑'이라는 것과, '현장의 재량권'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상전들이라는 점이다.
▲성공과 위기
HMM, 어려움은 쉽게 극복했는데... 정작 위기는 호황국면에서 돌출하다
2017년 한진해운이 파산했고, 배 대표는 빈사상태였던 HMM의 경영을 맡게 됐다. HMM은 단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백척간두에 놓였던 한국해운의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2016년 11주차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가 400을 찍을 만큼 살인적인 해상운임 속에서 기진맥진한 HMM의 선복량은 40만 TEU에 불과했다. 파산한 한진해운의 선복량이 100만 TEU를 넘겼던 것과 비교하면 작아도 너무 작은 해운회사였던 셈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배였다. 해운회사에 배가 없었다. 우선 자사소유의 배가 없었다. 비싼 용선료를 지불하는 배가 더 많았다. 또한, 경쟁력있는 배가 없었다. 배는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어야 경쟁력이 있다. 같은 연료비로 더 많은 짐을 실어야 했다. 그리고,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를 피할 수 있는 친환경 설비를 갖춘 배가 필요했다. 스크러버를 장착하고 LNG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배가 대량으로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배 대표에게는 있었다.
이를 기초로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이 수립됐고, 해양진흥공사가 설립됐다. 2018년 초대형컨테이너선 20척이 국내 조선3사에 발주됐고,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듯이 코로나19로 해상물류 수요가 선박 인도에 맞춰 증가했다. 지난해 2만4000TEU급 선박12척이 인도되면서 모두 만선을 이어가고 있고, 올해 1만6000TEU급 선박 8척도 만선행진에 합류했다.
지난해 말 HMM은 사상 최대인 9808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진짜는 올해다. 지난 1월 사상 처음으로 2000선을 돌파한 SCFI는 상승을 지속하면서 지난달 말에는 무려 4196까지 치솟았다.
해운업은 제조업과 달라서 재료비가 들지 않기 때문에, 운임 상승은 영업이익으로 직결된다. 3분기 영업이익이 50%를 상회할 것이 확실시되는 이유다.
올해 증권가 컨센서스에 따르면, 전직원이 1500여명인 HMM의 영업이익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5조원을 뛰어넘을 전망이다. 직원 1인당 3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이다. 국내 최고기업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의 올해 추정 영업이익이 53조원, 직원수가 11만여명인 것과 비교하더라도, HMM은 약 6배 정도 1인당 영업이익이 많고, 영업이익률도 최소 45%로 삼성전자의 약 19%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한편, 해운업계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해상운임 강세가 내년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깜짝 성공은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해진공 직원이 사리사욕을 앞세워 내부정보를 이용한 투자로 이익을 챙겼다가 들켰고, 각종 인사에 집요하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은행은 자금지원을 통해 HMM을 살렸다는 명분을 앞세워 직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하거나, 전환사채(CB) 등을 통해 큰 이익을 챙겼으면서도 경영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산업은행 등 정부기관은 총 3조8000억원을 지원했으나, 이미 3000억원은 주식전환을 통해 2조원 이상의 이익을 챙겼고, 남은 영구채에 대해서도 상환을 거부하고 HMM에서 꼬박꼬박 이자를 받아가고 있다.
당초 지원한 3조8000억원은 HMM의 회생에 큰 도움이 됐지만, 이는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법적인 의무를 다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실제로는 국내 조선3사에 선박을 발주한 용도여서 단순히 HMM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조선3사도 함께 지원한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정작 주인이 없다. 어느 주인의 손에 넘어가느냐에 따라 한국 해운의 미래가 좌우되는 위기에 놓인 셈이다.
▲향후과제
HMM,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 변모해야
배재훈 대표가 임기 안에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 HMM을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급선무는 산은으로부터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경영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민간매각이든 국민공모든 국가기간산업이 최적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위해서 적시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후임자를 위해서도, 대한민국의 수출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다.
시기와 방법은 배 대표가 정해도 좋다. HMM과 한국해운에 필요한 목소리를 한번은 내줘야 한다. 한국의 해운재건을 함께 이끌었던 박준영 전 해양수산부 차관이 없는 지금, 배 대표는 그의 몫까지 해내야 한다.
해운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라는 사명감을 요구할 만한 사람이 배 대표 말고 보이지 않는다. HMM은 한국 해운의 미래이며, 한국의 미래다.
김의철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