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순간’이란 무엇인가. 한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선대의 말 한마디가 웅장한 울림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 또는 사소한 이벤트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별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기업인에게도 별의 순간이 있다. 이 별의 순간은 기업인 개인의 운명은 물론 국가미래까지 변화시키는 ‘터닝 포인트’다. 산업을 재편하고, 일반인의 일상과 사회의 미래까지 바꾸는 거대한 수레바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별의 순간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 회장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애플의 아이폰을 보고는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카카오톡을 창업한다. 단순한 생각이 그에게는 카카오를 국민 메신저로 자리잡게 하는 터닝 포인트였다.
<녹색경제신문>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요 기업인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오늘 그들의 성공을 가져온 터닝 포인트와 위기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 등을 다루는 ‘CEO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註(주)]
김지찬 LIG넥스원 대표이사는 방위산업 분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LIG넥스원의 전신인 금성정밀에 1987년 평사원으로 입사해 31년만인 2018년 3월 대표이사의 자리에 올랐다.
방산업계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베스트드레서이기도 한 김 대표는 스마일맨으로도 통한다. 그를 직접 만나보면, 그가 상대에게는 봄바람같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김 대표는 올해초 연임이 결정되면서 오는 2024년 초까지 LIG넥스원을 이끌게 됐다. 방산업계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전환기를 맞아 남은 임기 동안 그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 터닝포인트
방산비리의 태풍이 방산전문가를 CEO로 만들어
무엇보다도 이명박정부 시절 일명 '사자방(사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으로 일컬어지는 방위산업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김 대표의 진가가 드러났다.
LIG넥스원은 민수분야가 없는 방산 전문기업이면서도 전투기, 함정, 전차 등 운반체가 아닌 미사일, 레이더를 포함한 다양한 전투체계를 생산한다. 미국의 레이시온과 가장 유사하다.
만일 사자방으로 비롯된 방산비리의 태풍이 없었더라면, 그에게 대표이사의 중책이 주어졌을지는 미지수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최고경영자의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유도무기와 감시정찰, 지휘통제통신, 항공, 전자전 등 다양한 분야의 첨단 국산무기의 연구개발과 생산 현장에서 30년 넘게 경험을 쌓았다.
2012년 부터 시작된 방산비리의 태풍이 업계를 강타했던 2013년 전무로 승진하면서 사업개발본부를 맡은 그는 대학(국민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만큼 연구개발을 강조해왔다. 매년 ‘기술 페스티벌’, ‘올해의 넥스원인(人)상’ ‘대표이사 표창’ 등을 수여해 연구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 성공과 위기
2년 연속 실적개선됐지만, 미래 방산 성과는 부족
LIG넥스원은 올해 2분기 기준 매출 4399억원, 영업이익 288억원을 올려, 지난해 2분기 매출 3489억원, 영업이익 78억원에 비해 실적이 대폭 개선됐다.
연간 경영실적도 지난해 1조6003억원, 영업이익 637억원으로, 2019년 매출 1조4527억원, 영업이익 181억원에 비해 크게 늘었다. 올해 실적은 1조8237억원 영업이익 890억원을 올릴 것으로 증권가에서는 전망하고 있어 또다시 큰 폭의 실적 개선이 기대된다.
실적과 전망이 좋아지면서 주가도 오르고 있다. 23일 종가 기준 주가는 주당 5만2200원으로 1년전에 비해 67%나 올랐다.
한편으로는 LIG넥스원 뿐만 아니라, 모든 방산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수출실적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방산은 별도의 매장을 갖추고 영업을 할 수 없고, 군사기밀 내용이 많아 온라인 판매도 제한된다.
무엇보다도 국제 방산시장이 재래식 전투체계에서 차세대·미래형으로 급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무인전투체계나 5세대 전투기, 드론, 차세대 장갑차량, 웨어러블 로봇과 레이저 무기 등에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
방위사업청(청장 강은호)은 지난 2019년 조직개편에 나서 기반전력과 미래전력을 구분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기반전력사업에서는 K-9자주포, K-전차, KF-21, 3000톤급 SLBM잠수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체계를 만들고 있지만, 미래전력분야에서는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향후 과제
민간기업 주도의 방산 생태계 구축해야
향후 국내 방산이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관(官)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김 대표는 올해 들어 LIG넥스원의 미래 먹거리 찾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인공위성과 로봇, 드론과 함께, 글로벌 방산기업인 레이시온과 손잡고 미국시장 공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우선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KPS)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인공위성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내년부터 2035년까지 14년간 총 3조7234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KPS사업은 고도 3만6000KM에서 지구를 도는 정지궤도 위성 3기와 경사지구동기궤도 위성 5기 등 총 8기의 위성으로 구성돼 자율주행, UAM, 드론, Iot, VR·AR 등 4차산업혁명 기술 진화를 지원하게 된다.
김 대표는 한국로봇산업진흥원과 한국로봇산업협회가 방산기관인 국방기술품질원, 한국방위산업진흥회와 지난 17일 체결한 '로봇산업 발전과 방위산업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에도 풍산 등과 함께 참가했다.
LIG넥스원이 이미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는 웨어러블 로봇과 함께 본격적인 로봇무기체계 개발에 나서기 위해서다.
김 대표는 또한, 지난해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개발한 유도로켓 ‘비궁’에 대해 미국 국방부로부터 성능을 공식 인정받으면서 미국 시장 공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비궁은 국내 개발 유도무기 최초로 미 국방부가 주관하는 해외비교시험(FCT)을 통과했다. 해외비교시험은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동맹국의 장비 및 기술을 평가하는 미국 국방부 프로그램이다.
지난 8월에는 레이시온과 함께 미국 ‘해양항공우주 전시회’에 참가해 현지 해군 등을 대상으로 무인수상정 플랫폼에 적용 가능한 발사대 시스템을 제안하기도 했다.
방산기업은 사업파트너가 정부여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LIG넥스원의 이같은 움직임들은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다.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에서 퍼스트무버(First Mover)로 진화하는 방산기업의 성공 모델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김 대표와 LIG넥스원 임직원들이 그것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김의철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