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식회계, 소버린사태 등 위기 직면했을 때 CEO세미나 통해 '사회적 가치' 경영 화두 제시
- '뉴SK를 향한 재도약' 선언 이후 이해관계자 행복 추구 등 변화 시작
최태원 SK 회장이 총수에 오른 후 2004년 CEO세미나를 처음 주재한 지 16년이 지났다.
최 회장은 SK그룹이 위기 때 마다 CEO세미나에서 최고경영진과 격의없는 토론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사회적 가치’와 ‘딥체인지(근본적 변화)’를 조직 내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CEO세미나가 큰 역할을 했다.
◆ 그날
소버린 사태 등 위기 속 CEO세미나 첫 주재...최태원 “이해관계자의 행복 추구”
2004년 10월, 최태원 회장이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열린 CEO 세미나를 주재하며 SK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다. 그룹 회장에 오른 지 6년 만이다. SK그룹 CEO 세미나는 최고경영진이 모두 참석하는 범그룹 차원의 경영전략회의로, 이 날 이전의 세미나는 손길승 회장이 주재해왔다.
특히 세미나가 열리기 1년 전인 2003년에는 소버린 사태 및 분식회계 사건으로 CEO 세미나가 열리지 않았다. 당시 최 회장은 1조5천억 원대의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있었다. 2년만에 열리는 이 세미나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최 회장은 CEO 세미나에서 고객·구성원·주주·사회 등 기업 이해관계자의 ‘가치 추구’라는 화두를 꺼냈다. 최 회장은 “그동안 SK 경영의 최우선 목표였던 이윤 극대화라는 경영 이념은 다원화되고 복잡한 경영 환경 변화에 맞게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 세미나에서 나온 최회장의 발언을 ‘사회적 가치’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지속 가능한 기업의 필수 조건을 ‘이윤 추구’에서 벗어나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기 때문. 한편으론 최종현 선대회장이 행동으로 보여줬던 ‘사업보국’ 정신에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 회장이 그해 4월 SK 51주년 창립기념식에서 ‘뉴SK를 향한 재도약 원년’을 선언 이후 SK그룹 경영헌장(SKMS) 수정본 완료와 함께 CEO 세미나를 계기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최 회장은 CEO 세미나에서 ▲사업구조, 재무구조, 지배구조 개선으로 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기업 ▲고객으로부터 선택받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신바람 나게 일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최고경영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을 다짐했다.
SK 관계자는 “당시 회장이 내놓은 경영철학이 이해관계자의 행복 추구였다”며 “경영목표를 이해관계자의 행복 극대화로 잡고 SKMS를 개정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1998년, 아버지 최종현 회장의 타계로 당시 38세의 젊은 나이에 SK그룹 회장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룹의 실질적 경영은 손길승 회장이 진두지휘했다. 손 회장은 1965년 최초의 대졸신입 사원으로 SK(옛 선경)에 입사한 이후 주요 요직을 모두 거치며 그룹 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최종현 회장 타계 엿새만에 오너 일가의 합의로 회장에 추대됐는데, 전문경영인이 재벌 그룹의 총수에 오른 것은 당시로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최 회장에 대한 재계의 시각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유약해 보였고 경영능력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최 회장은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로 그룹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고 부실의 책임을 지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 당시를 기억하는 SK그룹 임원들은 이 때를 계기로 ‘최 회장이 180도 변했다’고 말한다. 혹독한 시련이 그를 경영자로 단련시킨 셈이다.
이어 최 회장은 2009년 연세대에서 열린 '사회적 기업 국제포럼'에서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구체화됐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가장 전문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사회적 기업을 직접 설립 운영하거나 지원했다. 또한 사회적 기업에 정통한 전문가 양성 차원의 전문대학원(MBA) 신설 등 사회적 가치 생태계 강화에 나섰다.
◆ 그후
최태원 옥중 집필 ‘사회적 기업’...뉴SK 경영철학 '딥체인지+사회적 가치 창출' 제시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개념은 당초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에서 이후 ‘사회적 기업’으로 진화했다. 그는 10년 뒤인 2014년,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란 제목의 책을 통해 개념을 명확히 했다. 이 책은 그가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3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옥중 집필한 것이다.
최 회장은 “적정 기술(이윤만이 목적이 아닌 사회에 기여하는 기술)을 활용한 비즈니스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수익도 창출하는 ‘사회적 기업’이 정부나 비영리 조직보다 더 효율적”이라며 “이들이 다른 사회적 기업과 긴밀히 협력해 ‘합동작전’을 편다면 효과가 배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2015년 경영 복귀 후 '딥체인지'(Deep Change: 근원적 혁신)와 '사회적 가치 창출'을 '뉴 SK' 경영철학의 두 축으로 제시했다. 그룹 사업모델도 사회적 가치를 토대로 바꾸라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CEO 세미나에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 영리기업의 존재 이유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 창출'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 2016년 CEO 세미나의 화두는 '뉴 SK를 위한 딥체인지 실행력 강화'였다. 최 회장은 "독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당부했다.
2017년, SK 주요 계열사는 정관에 적혀 있던 ‘이윤 창출’을 빼고 ‘사회적 가치 창출’로 변경했다.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단체 등이 힘을 합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확장 개념이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더블보텀라인(DBL·Double Bottom Line) 경영’ ▲ 기업의 유·무형 자산을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인프라로 활용하는 ‘공유 인프라’ ▲ 사회적 가치 창출 전문가와 함께 협력하는 ‘사회적 기업 생태계 조성’ 등 3가지를 제시한다.
또한 2018년 CEO 세미나에서는 기업의 생존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전략이 필요하다고 보고 관련 비즈니스 모델 혁신 등을 주제로 집단토론 방식을 도입했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최 회장의 설파는 직원들이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전언이다. “도대체 ‘사회적 가치’가 왜 기업경영에 필요하냐”는 냉소적 시각이 존재했기 때문. 최 회장은 2019년에는 직원들과 직접 만나는 ‘행복토크'를 100회 진행하면서 사회적 가치에 관한 공감대 형성에 힘쓰는 등 소통했다.
SK는 이제 사회적 가치 창출을 수치로 측정해 각 계열사의 핵심성과지표 등에 반영하는 등 실질적 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계열사들의 사회적 가치 창출 관련 협업 등이 늘어나고 있다. 스타트업 기업들이 IT기술을 활용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업모델을 발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SK텔레콤의 임팩트업스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 그리고, 앞으로
재계 뉴리더 ‘맏형’으로서 역할 주목...국내외에 사회적 가치 확산 과제
SK그룹은 오는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제주도에서 CEO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올해 세미나에서는 최 회장이 강조하는 사회적 가치 추구 기반의 ‘스토리 경영’이 주요 화두가 될 전망이다. 이는 주가나 재무제표 같은 숫자로 정의되는 경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대입한 이야기 중심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경영 방식이다. 이 자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언택트 시대에 맞춰 세미나 방식 변화가 예상된다.
적어도 SK그룹 내부에서는 사회적 가치가 평가지표 등 경영의 중요 요소로 자리잡은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외부와의 공감대 형성이다. 최 회장은 다보스포럼을 비롯한 해외 주요 포럼 뿐만 아니라 2019년부터는 국내 최대 사회적 가치 축제인 ‘소셜밸류커넥트’ 행사에 참석해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올해 소셜밸류커넥트 행사에는 현대차그룹, 신한금융그룹, 포스코, 네이버, 카카오, 구글 등 일반기업들의 참여가 늘어나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재계 전반으로 확산으로 보기에는 아직은 미흡하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재산 분할 이혼 소송이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를 끼친다는 우려도 있다. 개인적 사안인 측면도 있지만 대중이 별개로 인식하지 않는게 현실.
사회적 가치 계승 차원의 승계 문제도 관심사다. 최 회장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최 회장의 차녀 민정(29)씨는 지난해 SK하이닉스에 대리급으로 입사했다. 민정 씨는 2017년, SK그룹 주최 '사회성과 인센티브' 수여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장녀 윤정(31)씨는 SK바이오팜 책임매니저로 근무하다 지난해 휴직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아들 인근(25)씨는 에너지 계열사인 SK E&S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계구도는 최 회장이 경영활동에 활발한 상황이어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최 회장은 지난 6월 기준 SK 지분 18.44%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 자녀는 아직 지분이 없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경제단체를 맡아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는 것도 과제가 될 전망이다. 젊은 오너 중 ‘맏형’ 역할로서 의미가 있지만 '등판 시기' 등 고민이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HR전문가인 안현진 코치는 “재계 뉴리더답게 최태원 회장이 앞장서 변화 아젠다를 잘 잡고 새로운 조직혁신을 시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면서도 “여전히 SK가 보수적이라는 답답함도 존재한다. 변화가 더딘 측면은 과감한 드라이브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우리나라에는 아직 낯설어 정착시키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바람직한 길”이라며 “장학퀴즈 등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가 연장선 상에서 사회적 가치로 확장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SK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기업 모델 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