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별 안내문 공지 ‘평생보증 프로그램’ 후속 조치...한국·미국 등 469만대
- 은폐 의혹 수사 진행 중...한국 보다 미국 처벌 수위 높아 ‘촉각’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결단했다.
지난해 10월, 결함이 있는 세타 엔진 장착 현대차 469만대에 대해 리콜을 발표한 것이다. 이른바 ‘평생 보증 프로그램’이다.
발표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평생 보증 프로그램’ 고객 대상 통보와 함께 무상 수리 등이 진행 중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은폐 의혹 관련 수사가 이뤄지고 있어 ‘사법 리스크’는 남아 있다.
최대 1조원으로 추정되는 비용이 소요되는 대규모 리콜은 현대차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오너 경영인이 아니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란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는 현대차그룹 수장 정의선의 선택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날
현대차 초유의 1조원 비용 ‘평생 보증 프로그램’ 전격 발표
"품질과 안전, 환경과 같은 근원적 요소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완벽함을 구현하겠습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2019년 밝힌 신년사의 한 대목이다.
자신의 말 대로 정 수석부회장은 품질 이슈가 제기되자 리콜 카드를 꺼내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2019년 10월 10일, 현대차그룹은 세타2 엔진이 장착된 차량을 구매한 한국과 미국 고객을 대상으로 ‘평생 보증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한국 52만 대, 미국 416만 대 등 무려 469만대 규모다. 현대•기아차는 ‘평생 보증 프로그램’ 비용으로 ▲미국 내 집단소송 고객들에 대한 화해 보상금 각각 460억원, 200억원 ▲품질 충당금 각각 5540억원, 2800억원 등 약 9000억원을 책정했다.
당장 현대차 실적에 심대한 타격이 예상됐지만 ‘고객의 신뢰가 먼저’였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이며 현대차가 처음 실시하는 제도다.
현대기아차는 세타2 직분사(GDi) 엔진이 장착된 차량 소유주에게 엔진 예방안전 신기술인 엔진 진동감지 시스템(KSDS) 적용을 확대하고 엔진에 대해 평생 보증을 해주기로 했다. 엔진 결함을 경험한 고객에겐 보상도 포함된다.
한국 내 대상 차량은 2010~2019년형 현대차 쏘나타(YF/LF)•그랜저(HG/IG)•싼타페(DM/TM)•벨로스터N(JSN) 등과 기아차 K5(TF/JF)•K7(VG/YG)•쏘렌토(UM)•스포티지(SL) 등이다.
또한 현대차는 집단소송이 진행 중이던 미국에서 원고측과 화해안에 합의했다. 미국 법원에는 화해합의 예비승인을 신청했다.
앞서 2016년 10월 9일, 현대차는 미국에서 세타2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2011~2014 쏘나타를 구매한 고객들이 제기한 집단 소송에서 원고와 합의한 바 있다. 2015년부터 시작된 결함 논란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
현대차는 2015년 9월, 미국에서 세타2 엔진이 탑재된 차량에서 주행 중 시동 꺼짐 현상, 화재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47만대를 리콜했다. 2017년 3월에는 119만대 차량에 대한 추가 리콜을 실시했다. 국내에서도 국토교통부가 조사에 돌입하자 17만대를 리콜했다. 당시 리콜은 신종운 전 품질담당 부회장의 지시로 이뤄졌다.
현대차의 ‘평생보증 프로그램’은 국내 고객 차별 논란과 미국 집단소송에 대해 종지부를 찍겠다는 오너 경영자의 의지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정 수석부회장 체제 이후 현대차는 품질 이슈가 제기되면 줄곧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현대차는 2019년 3월 쏘나타를 출시한 뒤 차량의 소음과 진동 등에 문제가 발견되자 생산을 잠정 중단했다. 올해 1월 출시한 제네시스 GV80 디젤 모델 일부에서 간헐적 진동현상이 발견되자 6월5일 출고를 중단하고 품질 점검에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차 측은 “고객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 개발 등 자동차 회사 본연의 업무에 더 집중하겠다는 정 수석부회장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명한다.
품질 이슈 해결을 위한 대승적 결단은 주효했다. 송선재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세타 엔진과 관련된 품질 이슈의 가장 큰 소송 건이 해결됐다는 점은 관련 불확실성 해소에 일조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 유지와 신뢰도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후
현대차 “고객 지향 기술 개발 및 품질 확보를 통해 만족도 향상에 심혈 기울일 것”
“현대차는 고객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모든 사안을 계속 점검하고, 고객 지향의 기술 개발 및 품질 확보를 통해 고객 만족도 향상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나간다는 방침입니다”
현대차 측은 품질 문제 앞에 단호하게 답했다.
현대차는 올해 7월 20일부터 고객들에게 개별 안내문 공지 후 ‘평생보증 프로그램’ 후속 조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10월 발표 이후 일부 무상수리를 진행하는 동시에 세부 프로그램을 준비 후 단계적으로 리콜에 나선 셈이다.
현대기아차는 고객들에게 무상수리 기간을 2022년 1월 19일 까지로 공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상 수리는 전자제어장치(ECU) 신규로직(KSDS) 적용 업그레이드 등이다. 현대차와 기아차 서비스센터에서 25분 정도 소요된다. 무상수리를 받지 않으면 엔진 소음 및 진동 감지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엔진 콘로드 베어링 손상 문제로 화재 및 엔진 교환을 경험한 고객에 대해서는 ▲보증기간 초과 후 수리비용 보상 ▲견인비 보상 ▲부품결품 보상 ▲엔진 화재 손실 보상 ▲기존 차량 중고 판매 후 당사 차량 신규 구입시 인센티브 제공 등을 제공한다.
올해 8월 31일 이전 발생한 과거 사건에 대해서 2021년 4월 12일까지 180만원 할인 등 보상이 가능하다. 만약 통지문 수령 이후 발생한 엔진 화재 손실 보상 및 인센티브 프로그램은 발생일부터 90일 이내에 보상 가능하다.
문제는 세타2 엔진 결함 의혹에 대한 한국과 미국에서의 검찰 수사다.
현대차는 미국 뉴욕주 남부 연방검찰청(SDNY)과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수사를 받고 있다. 2015•2017년 실시한 리콜의 신고 시점과 대상 차종 범위가 적절했는지 등이 주요 핵심 사안이다. 처벌 수위가 높은 미국 검찰의 수사 결과가 더 관심을 받는다.
국내 자동차관리법은 제작사가 결함을 알게 되면 지체 없이 그 사실을 공개한 뒤 시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어기면 10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미국에선 차량 결함을 인지한 뒤 5일 이내에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 리콜 관련 법규를 위반하면 최대 1억900만달러(한화 1275억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리콜을 축소한 사실이 인정돼 추가 리콜 명령이 떨어질 경우 집단소송의 위험도 안게 될 수 있다.
한국 검찰은 올해 6월 1일, 현대차 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지난해 엔진결함 은폐 의혹 수사 때 검찰 내부 비밀이 직원 A씨에게 유출된 정황이 파악됐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지난해 7월, 그랜저•소나타•K5 등 차종에 적용된 세타2 엔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국 조사가 있을 때까지 이를 밝히지 않고 리콜 등 조치를 하지 않아 자동차관리법 위반 혐의로 현대차 수사를 진행해왔다.
당시 신종운 전 품질 총괄 부회장, 방창섭 전 품질본부장, 이모 전 품질전략실장이 ‘불구속 기소’됐다.
올해 4월 3차 공판에 이어 8월 19일, 신 전 부회장 등에 대한 4차 공판이 진행됐다. 최대 변수는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에 대한 재판부의 인용 여부다. 변호인단은 '자동차관리법 31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재판부에 냈다.
재판부가 신청을 받아들이면 이 사건 공판은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결정이 나올 때까지 중단된다.
핵심 쟁점은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결함’을 어디까지로 봐야 할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결함 사실을 알게 된 날’이라는 기준 역시 모호하다는 주장이다. '결함을 인지한 주체'를 실무자로 봐야 할지 아니면 최고경영자로 봐야 할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위헌 여부와 관련해 문제될 여지가 있어보인다”며 “통상적으로 해당 법조항의 불명확성 정도는 재량에 따라 위헌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데, 기술적 부분과 관련해선 따져볼 만 하다”고 전했다.
앞서 2017년 4월, 시민단체 YMCA는 "세타2 엔진 결함에 대한 의도적 은폐가 의심된다"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정몽구 회장에 대해선 건강 악화로 수사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보고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정 회장은 대장 염증의 일종인 게실염 등 병환으로 병원 입원이 지속되기도 했다.
현대차가 평생 보증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지만 동시에 ‘사법 리스크’라는 불확실성이 고객 신뢰에 의문 부호를 남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앞으로
“총수가 10년 후 미래사회 ‘큰 그림’을 갖고 소비자 중시 경영을 본격화한 것”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지난 2018년 9월 총괄 수석부회장에 취임한 이후 경영진에게 "단기 실적 부진을 감수할 수 있으니 세타2 엔진 결함 문제는 확실하게 매듭지으라"고 지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자율주행차, 플라잉카(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 미래차에 미래 비전을 건 정 수석부회장에게 품질과 안전 문제는 양보할 수 없는 과제다.
현대차가 올해 1월 세계 최대 IT전자 전시회 ‘CES’ 행사에서 ▲안전성(Safe)을 최우선 원칙으로 ▲저소음(Quiet) ▲경제성과 접근 용이성(Affordable) ▲승객 중심(Passenger-centered)이란 현대차의 UAM(도심항공모빌리티) 4대 원칙을 발표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특히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를 위해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 같은 교통 여건이 좋은 환경뿐 아니라 불확실성이 높고 다양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테스트를 확대할 생각”이라며 “차량의 전장화는 고객 편의를 증대시켜 주겠지만 그와 함께 결함도 같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결함들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밝혔다.
이어 “차량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스마트폰이나 PC처럼 바로 재설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며 “현대차그룹이 품질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현대차그룹이 출범한 지 20주년의 해다. ‘평생보증 프로그램’은 정몽구 회장의 경영철학인 ‘품질 경영’ 뜻을 계승해 외부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방점을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차는 평생 보증 프로그램 이외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과징금 부여 가능성과 기소 및 형사 합의금 지급 등 리스크가 남아 있다.
미국에서 생산해 제3국으로 수출된 차량은 현대차 38만대, 기아차 21만대 등으로 이들 차량에 대한 소비자 분쟁 소지도 남아 있다.
정 수석부회장의 결단과 약속에 대해 평가는 긍정적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소비자 신뢰 문제에 능동적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며 “총수가 10년 후 미래사회 ‘큰 그림’을 갖고 소비자 중시 경영을 본격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5월 23일,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과의 대담에서 미래 성장을 위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에 단순 명쾌하게 ‘고객’이라고 답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요즘 "'고객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서비스, 제품 등 모든 측면에서 우리가 고객에게 집중하기 위해 더 노력할 여지가 없는지를 자문하고 있다”며 “고객중심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차그룹 모든 직원들은 고객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 중인 현대차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