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창수 회장, 정경유착 창구 사회본부 전면 폐지 등 혁신안 및 구조조정 실시 나서
- 4대 그룹 탈퇴로 연간회비 77% 감소...희망퇴직과 직원 연봉 30% 삭감 등 고난
- 대한상의에 재계 '맏형' 자리 내줘..."경제단체 본연의 역할 묵묵히 할 것"
재계를 대표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해산 위기에 처한 지 4년이 흘렀다. 지난 2016년 10월, 전경련 해산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 올랐다. 국정농단에 연루되면서 위기에 처한 것.
결의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이 전경련에서 탈퇴했다. 4대 그룹의 탈퇴 이후에도 현 정권의 ‘전경련 패싱’은 줄곧 계속 됐다. 그리고 재계 경제단체 ‘맏형’ 자리는 시나부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차지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살아남았다. 비용 절감과 함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했다. 허창수 회장은 4회 연임을 하면서 전경련을 지켰다. 전경련은 내년 2월이면 다시 차기 회장을 뽑고 위상 제고에 나서야 한다.
◆ 그날
‘국정농단 사태 연루’ 전경련 위기...창립 멤버 삼성 등 잇단 탈퇴
2016년 10월 16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전경련 해산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전경련 해산촉구 결의안에는 정의당 의원 6명 전원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에선 김부겸 의원을 포함한 55명이, 국민의당에선 정동영 의원을 포함한 9명이 이름을 올렸다. 새누리당에선 김용태 의원 한 명이 동참했다.
심 의원은 “민간경제단체에 대해 국회가 해산이라는 극약처방을 주문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닌데도 무려 칠십 명이 넘는 여야 의원들이 뜻을 함께했다”며 “전경련 해체가 이념을 초월한 ‘사회적 합의’가 됐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그는 또 “전경련은 경제민주화에 저항하고, 낡은 재벌체제를 옹호해온 재벌의 첨병(尖兵)”이라며 “전경련 해체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경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최순실(최서원)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적폐'로 낙인찍혔다. 최순실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해 전경련 회원사들을 상대로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을 출연하도록 강요했다.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38개 보수·단체와 개인에게 총 61차례에 걸쳐 25억여원을 지원했다.
발의 다음 날 결의안은 국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전경련 해산 결의안은 이후 차일피일 미뤄지며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허창수 회장은 12월 6일,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참석해 전경련 해체를 추궁받았다. 허 회장은 "이때까지 불미스런 일에 관계 돼 있다는 건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해체는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즉답을 회피했다.
전경련의 진짜 위기는 4대 그룹의 탈퇴였다. 그룹 계열사들의 잇단 탈퇴로 이어져 자금줄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4대 그룹은 2015년 기준 전경련 연간회비 492억원 가운데 77% 정도인 378억원을 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LG가 2016년 12월 27일, 전경련에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이어 삼성전자가 2017년 2월 6일, 전경련에 탈퇴원을 제출했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6년 국회 청문회에서 삼성의 전경련 탈퇴를 선언한 데 따른 조치였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주축이 돼 설립된 전경련으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SK는 그해 2월 16일, 현대차는 2월 21일 탈퇴원을 제출했다. 현대차의 경우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전경련 최장기 회장을 맡았던 만큼 인연이 깊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거센 시련 앞에 섰다.
◆ 그후
혁신안 불구 정권의 '전경련 패싱' 지속...허창수 회장의 ‘고군분투’
2016년 12월 28일. 허창수 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 첫 공식 사과를 했다.
허 회장은 전경련 회원사들에 보낸 서신에서 "전경련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회원 여러분께 많은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렸다"며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허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새 회장을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회장을 맡겠다고 나선 이는 없었다.
허 회장은 2017년 신년사에서도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며 “국민의 엄중한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경련은 그해 3월 정경유착 근절과 명칭 변경, 투명성 및 싱크탱크 강화 등을 담은 혁신안과 함께 환골탈태를 선언했다. 정경유착 통로 역할을 했던 사회본부를 전면 폐지했다. 기존 7본부에서 1본부 2실 체제로 줄였다. 240명이던 인력은 90명 수준으로 구조조정했다. 한 때 최고의 직장이었던 전경련은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직원 연봉도 30% 삭감했다.
대외협찬 전면 금지, 외부감사 강화 등도 실시했다. 대기업 이익 대변에서 저출산, 교육 등 국가적 아젠다 제시로 역할 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조직 개편 외에 '한국기업연합회'로의 명칭 변경 등 발표한 혁신안은 대체로 이행되지 않았다. 전경련 관계자는 “회원사 일부 반대 등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며 “이미 싱크탱크 등 연구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굳이 경제단체를 없앨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권은 ‘전경련 패싱’을 이어갔지만 여당 등에서 일부 변화 기류가 나타나기도 했다.
2018년 1월 10일, 전경련은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와 함께 올림픽 성공을 위한 후원기업 신년다짐회를 열었다.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 자리에 참석해 경제계 인사들에게 올림픽 티켓 구매를 독려했다.
같은 해 11월 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회는 기업인 100명 등이 포함된 대규모 방북단 모집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전경련에 발송했다. 같은 달 민주당의 ‘경제를 공부하는 국회의원 모임’은 배상근 전경련 총괄전무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허창수 회장은 2019년 2월, 전경련 회장직을 4번 연임하며, 5번째 취임했다. 후임자를 찾지 못하자 스스로 책임을 맡은 셈이다.
2019년 3월에는 허 회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필립 벨기에 국왕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이는 당시 GS 회장 자격으로 참석이었다. 정부의 ‘전경련 패싱이 끝났다’는 관측이 나오자 청와대는 “전경련과 소통할 필요를 못느낀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전경련이 마련한 미세먼지 세미나에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참석하는 등 교류가 이어졌다.
같은 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라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전경련의 역할론이 재조명됐다.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한·일관계 특별대담에서 “지난 4월 전경련에서 개최한 한·일관계 진단 세미나에서도 ‘자민당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며 쓴소리를 했다.
그해 8월 20일, 민주당 의원들은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과 일본 수출규제 등을 주제로 정책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는 민주당 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전경련은 올해 들어 지배구조 규제 강화 상법 개정안, 대기업집단 확장 규제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에 반대 입장을 내며 존재감을 나타냈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해외 네트워크를 통한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정부와 단절된 반쪽 짜리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 그리고, 앞으로
대한상의에 재계 ‘맏형’ 자리 내준 전경련, 신뢰회복 한계 극복할까
전경련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재계 대표기관의 자리를 대한상의에 내줬다.
전경련은 1961년 8월 창립 이후 1988년 전두환 일해재단 모금,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2002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등에 연루되며 '정경유착 창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전경련은 내년 2월 차기 회장을 뽑아야 한다. 허창수 회장은 지금부터 후임자를 찾아야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 허 회장은 지난 2011년 이후 10년 간 전경련 수장 자리를 맡아 고군분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련의 추락한 위상 회복과 함께 재계에서 좁아진 입지 개선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더욱이 현 정권에서 ‘전경련 패싱’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차기 회장 인물난을 겪고 있는 전경련과 비교해 다른 경제단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이를 테면 대한상의는 내년 초 조직을 이끌 현 박용만 회장 후임자를 물색 중이다. 대한상의는 커진 위상 만큼 차기 회장직에 하마평이 넘친다. 최태원 SK 회장을 비롯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등 이름이 오르내린다.
문제는 신뢰회복이다. 비판적 시각을 가진 시민단체 등은 전경련이 '몸집을 줄였을 뿐 내부 혁신은 여전히 미흡하다'며 전경련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던 국정 농단 사태 연루 당시와 변함 없이 조직의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해산까지는 아니라도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구광모 LG 대표 등이 내놓은 전경련의 '한국형 헤리티지재단 모델 전환'이 대표적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보여주기식 변화 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싱크탱크 기능을 강화하는 등 경제단체 본연의 역할을 묵묵히 할 것”이라며 “국가적 아젠다도 꾸준히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주요 대기업이 다시 재가입할 토양을 만드는 것도 과제다. 이들 대기업은 대한상의에는 주요 회원사로 남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경련이 신뢰 회복과 함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임기 끝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전경련 허창수 회장에게 남겨진 마지막 과업이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