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경제신문 = 임채영 기자] 법조계에 ‘AI 태풍’이 상륙했다. 전문 변호사들은 생존과 효율을 위해 AI를 레버리지로 활용하며 시장을 확장하고 있지만, 정작 재판 현장에서는 AI의 환각(Hallucination) 현상과 비법조인의 무분별한 오남용으로 인한 ‘가짜 정보’의 습격에 신음하고 있다.
◇ “단순 번역·리서치 장벽 허무는 도구”… 변호사들에겐 ‘생존의 무기’
법률계의 풍경은 이미 바뀌었다. 다수의 변호사들은 ‘엘박스(LBox)’, ‘슈퍼로이어’ 등 리걸테크 솔루션이나 챗GPT를 업무의 필수 도구로 삼고 있다.
영국 변호사 자격을 준비 중인 현직 변호사 A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국제 법무를 수행함에 있어 언어와 리서치의 장벽이 높은데, AI는 그 장벽을 허무는 확실한 ‘레버리지’”라고 정의했다.
그는 “AI가 완벽한 법률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초안 작성과 교차 검증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것은 사실”이라며 “앞으로는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법조 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AI는 데이터를 줄 뿐, 책임과 통찰은 결국 인간 변호사의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 “증거자료 막 올리다간 큰일”… ‘나홀로 소송’의 보안 불감증 경고
반면, 법률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이 AI를 맹신해 ‘나홀로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B 변호사는 “AI로 재판을 진행하는 비법조인의 경우, 잘못된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하고 법리적으로 틀린 주장이나 거짓된 판례를 인용해 오히려 소송 진행에 불필요한 시간을 잡아먹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B 변호사는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일반 당사자들이 서증(입증 서류)들을 마구잡이로 AI 사이트에 업로드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증에는 민감한 개인정보들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며 “이를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외부 서버에 마구잡이로 업로드하는 행위에 대해 심각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없는 판례 섞어 20장 제출”… 마비되는 변론주의
오염된 정보들의 피해는 고스란히 재판부와 사법 시스템으로 전가된다. 권창환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 주무위원·부산회생법원 부장판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단순히 판례 번호가 틀리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판례의 문구를 비틀어 전혀 다른 취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권 부장판사는 “과거에는 상호 공방을 통해 진실을 가리는 변론주의가 작동했으나, 지금은 AI가 생성한 20~30장 분량의 서면 속에 섞인 가짜 정보를 판사가 먼저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재판 지연을 가속화하는 주원인 중 하나”라고 토로했다.
◇ 변협 “이제 TF 구성 단계”… 예산 절벽에 멈춘 법원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지만, 이를 규율할 제도적 장치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AI 활용 윤리 규정이나 징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 위해 이제 막 TF팀과 소위원회를 꾸리고 대비를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밝혔다.
사법부의 자체 대응 시스템 구축 역시 예산 절벽에 가로막혀 있다. 사법부 AI 위원회는 ‘2030 사법 AI 로드맵’ 이행을 위해 약 4,1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봤으나, 실제 확보된 예산은 약 145억 원(3.5%)에 불과하다.
권 부장판사는 “현행 ISP(정보전략계획) 절차는 예산 수립부터 집행까지 2~3년이 소요된다”며 “매달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 AI 기술 속도를 고려할 때, 도입 시점에는 이미 ‘구형 기술’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꼬집었다.
◇ “기술은 포르쉐, 행정은 자전거”… ‘사법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취재 과정에서 만난 법조인들의 공통된 우려는 ‘속도의 격차’였다. AI 기술은 매달 새로운 모델이 쏟아져 나올 만큼 초음속으로 발전하는데, 이를 수용하고 규율해야 할 사법부의 예산과 행정 시스템은 여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 부장판사의 지적처럼 2~3년이 걸리는 경직된 ISP 예산 구조로는 디지털 재판의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변협의 뒤늦은 대응 역시 기술의 파급력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이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판사가 판결문을 쓰는 시간보다 가짜 판례를 걸러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체된 정의다.
사법부가 단순히 AI 도입을 서두르는 것을 넘어, 예산 집행의 유연성 확보와 실효성 있는 윤리 규정 마련이라는 투 트랙 전략을 시급히 가동해야 할 때다.
임채영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