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억 가입자 보유한 미국 CP 상대로 부담스러울 수 있어”
-유럽, 국내 보다 통신사 조직적인 움직임 강해...정면 대응 가능성도
유럽연합(EU)이 한발 물러선 것일까.
넷플릭스·구글에 트래픽 폭증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하겠다고, 망 이용료 지급 의무화법에 시종일관 강경했던 EU였다.
그러나 이번 MWC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기조연설을 통해 망 이용료 지급을 거부하는 미국 공룡 콘텐츠제공업자(CP)에 강력히 추궁하고 나설 것처럼 온갖 무게를 다 잡아놓고, 기껏 꺼낸 말이 적당한 자금 조달책을 찾자는 것이었다.
EU는 당장 망 이용료 지급을 강제하는 입법 절차를 추진 중이다. 현재의 이런 점을 고려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EU가 인터넷망제공업자(ISP)를 대변해 속 시원한 발언을 해 줄 것으로 잔뜩 기대했던 통신사들도 풀이 죽은 모습이다.
이를 두고 EU가 미국의 입김에 태도를 전환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적지 않다.
국내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녹색경제신문>에 “몇십억 가입자를 보유한 미국 글로벌 CP를 상대로 일방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 EU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통신사 가입자 수는 많아도 1억 정도일 텐데 아무리 조직적인 요청이 있다 해도 적당한 중재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MWC 국제 행사에서 첫 기조연설에 나선 EU집행부의 티에리 브르통 위원은 미국 빅 CP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했다. 그는 “통신 인프라에 드는 막대한 투자를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자금 조달 모델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네트워크 제공자와 트래픽 공급자 사이에서 이분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계에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으나, 오늘날의 네트워크는 최신 상태가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업계는 시대를 따라가야 하고 규제도 마찬가지가 돼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간 유럽의 보호무역주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 왔던 브르통 위원이었기에 이례적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특히, 입장을 분명히 했던 망 사용료 이슈와 관련해서 말이다.
브르통 위원에 이어 다음날 기조연설을 맡은 넷플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렉 피터스 넷플릭스 신임 공동대표는 “브르통 위원이 언급한 것처럼 양자택일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통신사가 각자 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좋은 접근방식”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통신사들의 이중 과금이 자칫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감소시키고 창작 커뮤니티 발전 저하로 이어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고가의 통신사 요금제가 가진 매력을 반감시켜 소비자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날을 세워 말했다.
넷플릭스는 오히려 자사의 투자로 전 세계 콘텐츠와 인터넷 생태계가 시너지를 내는 데 이바지했다는 뉘앙스로 얘기했다. 피터스 공동대표는 “넷플릭스는 지난 5년간 매출의 절반에 달하는 600억달러(79조원) 이상을 콘텐츠에 투자했다”라며, “이는 콘텐츠가 질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이르러, 더 많은 사람이 인터넷 서비스를 찾도록 만들었으며 즉 ‘선순환 고리’를 만들게 됐다”라고 강조했다.
EU집행위원회는 현재 넷플릭스·구글 등 글로벌 거대 CP에 망 사용료 지급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 뒤에 있는 미국이라는 커다란 장벽이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SK브로드밴드와 넷플릭스의 소송전으로 사실상 망 사용료 이슈의 신호탄이 된 한국에서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한 이후 ‘무임승차금지법’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한 “망 접근·이용에 대해 어떠한 조건도 부과되지 않도록 보장하라”라는 내용의 산업통상자원부 문건이 공개된 뒤로, 국회가 신중한 태도로 전환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미국 정부가 ‘무임승차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한국의 국제무역 의무에 대한 우려가 커질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유럽은 사실 국내 상황보다 통신사들의 집단적인 요청이 강하고, 망 사용료 의무화 법안이 통과될 시 취할 수 있는 이익도 더 많다”라면서도, “하지만 상대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빅테크 기업들이며, 앞으로 EU에서 어떤 방향으로 판단을 내릴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고명훈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