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타버스는 게임 아닌 가상공간 … 성범죄 온상 될 수 있다는 지적 잇따라
- 기술 개발 속도에 비해 규범 논의는 뒤쳐져
- 한국은 정부-학계, 미래 먹거리 강조하며 규제 완화 목소리만
메타 주주들, 메타버스 위험성 지적 … 규제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 이어져
미국 메타(Meta)의 주주들이 메타가 준비 중인 메타버스에서의 이용자 보호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에서는 메타버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법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며 규제 마련이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온 가운데, 한국은 규제 완화만 외치고 있어 우려가 커진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의 SNS를 운영하는 메타는 메타버스에 대한 마크 주커버그 CEO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사명까지 ‘메타’로 변경하며 메타버스 진출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다. 하지만 주주들이 여기에 제동을 걸며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야후 파이낸스(Yahoo Finance)’ 보도에 따르면, 주주들은 주주총회에서 “과연 메타버스가 현실 세계에서의 위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다양한 법적 문제를 예상하는 주주 제안(Shareholder Proposal)을 제출했다. 메타는 이 의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메타버스의 가상환경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법적 규제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하버드 로스쿨의 로렌스 레식(Lawrence Lessig) 교수를 비롯한 패널들은 사생활 침해, 정보 수집, 지적재산권 침해, 소수자 혐오 등 다양한 문제들을 예상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빠른 기술 개발 속도에 비해 규범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상황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더유에스선(The US Sun)'은 또 다른 보도에서, “메타버스가 성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매체는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 착취나 성매매 등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규제 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4차 산업혁명 미래 먹거리 강조하며 ‘규제 완화’ 한 목소리
반면 한국은 정부와 학계 모두 “메타버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 일색이다. 미래 먹거리를 개척하는데 규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지난 3월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전문가들은 규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메타버스의 특징에 대한 발제 말미에 "메타버스 진흥책을 정부가 마련하더라도 미리 규제하는 방향은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민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메타버스와 게임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며 “현행 게임 규제안을 앞으로의 메타버스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했다. 이주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디지털콘텐츠과 과장은 "메타버스 산업 진흥을 위해 자율 규제 원칙이 담긴 법안을 준비 중"이라며 정부 주도의 규제에 나서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고낙준 방송통신위원회 이용자정책총괄과 과장 역시 "앞으로 발전할 산업에 대해 규제안으로 미리 재단하지 말자는 말에 공감한다"면서 자율 규제 방침을 밝혔다.
주최 측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의 이해관계와 행사의 목적을 고려하더라도, 국민 보호라는 공적 책임에 앞장서야 할 정부 부처 관계자들까지 규제 논의를 팽개친 것은 ‘지나친 기업 편의주의’라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메타버스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법적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패널들이 말한 대로 메타버스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자유로운 가상환경이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는 거의 그대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오히려 현실보다 복잡한 법적 쟁점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규제를 무조건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정부 입장에서는 이용자 보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밝혔다.
AI 혐오발언·메타버스 성추행 등 … 규제는 없는데 문제는 이미 코앞에
작년 1월, 스캐터랩이 개발한 AI ‘이루다’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씁쓸함을 안긴 바 있다. MZ세대 여대생 AI라는 특징을 내세워 ‘친구가 될 수 있는 AI’를 표방했지만, 이용자들의 성희롱과 혐오발언을 학습하며 논란이 됐고, 결국 서비스가 중단된 끝에 올해 3월 다시 베타서비스에 나섰다.
당시 이루다가 학습해 보인 반응들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많았다. 소수자 혐오, 성 차별, 개인정보 유출과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가 이루다의 입으로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 등 미국 기업이 개발한 AI도 마찬가지였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한편 메타버스 서비스를 이용하던 중 다른 이용자로부터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사례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실제로 메타의 자회사인 호라이즌은 최근 가상현실(VR) 소셜 메타버스 플랫폼인 '호라이즌 월드'에 성범죄 방지를 위해 아바타 간 '거리 유지' 기능을 도입하기도 했다. 메타버스 기술 연구 업체인 카부니의 니나 파텔 부사장이 호라이즌 월드에서 경험한 성추행 피해를 온라인에 상세히 공유하며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게임에 익숙해 메타버스를 쉽게 접하는 10대 이용자들을 중심으로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기업과 정부가 ‘탈규제’를 외치는 사이 법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피해를 입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 대부분이 미성년자나 여성, 장애인 등 약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메타버스에서는 누구나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타버스가 새로운 기술 산업으로서 육성하고 장려해야 할 대상이긴 하지만, 미국에서의 논의처럼 정부와 관련 업계가 이용자 보호를 최우선에 놓고 윤리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준용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