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후]IMF,국가 부도 23년···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 고통의 대차대조표를 묻다
상태바
[그날 그후]IMF,국가 부도 23년···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 고통의 대차대조표를 묻다
  • 박소연 기자
  • 승인 2020.11.20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무리한 차입경영에 연쇄부도·외환위기 덥쳐 사실상 국가 부도...1997년11월21일 IMF 구제금융 신청
- 기업들 줄도산, 금융회사 파산, 대규모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등 한국경제 근간 뒤흔들려
- IMF이후 국내은행 중 처음 해외 매각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탈은 1조원이상 차익 '먹튀'
- '눈물의 비디오' 이응준 씨, "조상제한서 → 신국하우, 몸집만 커져 눈물의 대차대조표, 자신있나"
(출처=영화 '국가부도의 날' 한장면)

기업들의 연쇄부도와 외환위기가 덮친 1997년.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경제주권을 IMF에 내맡긴 상태에서 한보, 기아, 대우, 한라그룹 등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또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IMF 관리 체제가 본격 시작된 1998년 봄, 서울 강남의 제일은행 테헤란 지점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광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쇄를 눈 앞에 둔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곳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하루를 그린 다큐멘터리 '내일을 준비하며'는 '눈물의 비디오'란 이름을 달고 아픔의 역사로 기록됐다.

비디오가 나온 지 22년의 세월이 지나는 사이 제일은행은 SC제일은행으로 이름을 바꿨고, 당시 근무하던 이들이 떠난 자리는 깊은 상처를 뒤에 감춘 채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당시 현장 속의 증인은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가 '신국하우'(신한,국민,하나,우리)로 바뀐 지금의 금융권을 가르키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묻는다.

◆ 그날

부도도미노·외환위기 덥쳐 국가 모라토리움···사상 초유의 구제금융 신청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IMF가 뭔지도 몰랐던 우리 국민 가운데 자신의 직장이 사라지고, 설사 다른 일을 찾아도 비정규직이 될 공산이 크며, 이에 따라 가족 해체가 벌어질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일은행을 포함한 금융권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미 기업의 부실 채권 등으로 몸살을 앓던 상황이었다. OECD 가입을 위해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단기자본을 쉽게 빌릴 수 있게 되자 해외 단기자본이 밀려 들어왔다. 외환보유고가 130억달러에 불과한 가운데 은행들이 부족한 외화를 단기자금으로 끌어다 쓴 게 화근이었다.

1997년 1월 재계서열 14위의 한보그룹이 최종 부도 처리 됐다

이보다 앞선 1996년 12월 한국은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축포를 터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계에는 무리한 차입경영으로 사세를 키워갔던 한계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1997년 1월 재계서열 14위의 한보그룹이 최종 부도 처리됐고, 이어 3월 삼미그룹,  4월 진로그룹, 7월 기아그룹, 10월 쌍방울그룹, 11월 해태그룹, 12월 한라그룹까지 차례로 부도를 맞았던 것.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지자 이들에게 여신을 공급했던 종합금융회사, 증권사, 시중은행들의 부실채권은 급격히 증가했다. 그해 10월 말에는 미국 신용정보회사 S&P와 무디스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아시아 통화위기 전파를 보도하는 방송화면 (사진=SBS방송화면)

이런 와중에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자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 상황에 빠졌다. 우리나라도 원화가 폭락하며 외국인 투자자들은 자본을 회수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여름 달러당 800원 후반대였던 환율은 11월 10일 1000원을 넘어선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쳤고 급기야 경제주권이 IMF로 넘어가는 상황과 마주했다.

11월 23일 IMF 실무협의단이 입국한 이후 협상과 번복, 재협상이 이어진 결과 12월 3일 오후 7시 40분 임창렬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마침내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IMF가 대기성 차관 210억달러를 포함해 총 55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진 조건은 말그대로 경제 주권의 상실 그 자체였다. 외국인의 기업 인수 허용, 부실은행 조기 정리, 재벌기업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중단, 경제성장률 3% 수준 유지, 군비 축소 등 IMF의 요구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따로 없었다.

 

◆ 그후

기업 도산, 실업자 양산 구조조정의 시작···IMF 고통 상징 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 

외환위기 당시 해태제과 부도를 알리는 방송화면

1997년 12월 7일 한라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제일은행도 부실은행으로 전락했다. 유원건설, 한보, 뉴코아, 기아, 대우 등 주요 거래기업의 연쇄도산으로 초유의 한국은행 특별융자를 받으며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혈세 먹는 공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97년 말 제일은행은 대량 예금 인출 사태에 직면했다. 결국 정부는 IMF와의 합의에 따라 제일은행을 팔기로 결정했다. 제일은행 매각은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첫 번째 해외매각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했다. 

1997년 12월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제일은행에 경영개선조치를 내렸다. 금통위는 국내 점포 가운데 장기 적자 점포 및 영업망 중복점포, 경영전망 불투명 점포 등은 정리하도록 했다. 인력감축도 지시했다. 제일은행은 이에 따라 1998년 1월 21일 경영개선계획을 제출했다. 

SC제일은행[사진=녹색경제신문]
SC제일은행[사진=녹색경제신문]

제일은행은 직원 약 4000여명을 감원하고 지점 48개를 폐쇄했다. 테헤란로 지점은 이 때 폐쇄된 점포 중 하나였다. 당시 홍보팀에서 일했던 이응준씨가 폐쇄 직전 테헤란로 지점 직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바로 ‘눈물의 비디오’다. 25분짜리 이 비디오에는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은행원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씨는 “한때 업계에서는 ‘제일은행의 제일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일은행 임직원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당시 제일은행은 5대 대표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 중 하나로 꼽혔으며 LG·대우·기아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상당수를 주거래기업으로 확보한 은행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보다 더 법인세를 많이 낼 정도의 위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 직원들에게 명예퇴직이라는 단어도 생소했을 뿐더러 명퇴 대상 기준이 무엇인지, 만에 하나 대상이 된다면 당장 은행을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번에 명퇴신청을 하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고 그 무렵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1998년 당시 제일은행의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젊은 은행원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담긴 '눈물의 비디오'

당시 홍보부 계장이었던 이씨는 민병대 과장과 함께 영상을 기획한 뒤 일주일간의 휴가를 이용해 영상을 제작했다. 그는 “훗날 후배들에게 소위 ‘라떼는 말이야 이렇게 정말 힘들었던 때가 있었지. 그 때의 노력과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야’라는 차원에서 은행이 처한 상황과 이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 그리고 직원들의 목소리를 남기려 했다”고 제작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이후 현대카드와 기업은행, 우리카드의 홍보부서에서 일했으며 현재 한국미디어아카데미 총괄대표를 맡고 있다. 

금융권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1998년 6월 금융감독위원회는 대동·동화·동남·경기·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발표했다. 외환위기 당시 약 9만명의 금융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998년 12월 31일 정부는 뉴브리지캐피탈과 제일은행 매각에 합의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1999년 12월에는 예금보험공사가 뉴브리지캐피탈에 제일은행 지분 51%와 경영권을 양도하는 내용의 본계약을 맺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제일은행을 살리기 위해 17조6000억원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이 자금을 먹고 회생한 은행은 뉴브리지캐피탈에게 5000억원에 팔려나갔다. 헐값 매각 논란이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은행을 집어삼킨 뉴브리지캐피탈은 다음 해인 2000년 2500명 규모의 직원을 감축했다. 

2005년 제일은행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인수됐다. 뉴브리지캐피털이 SCB에 제일은행을 매각한 금액은 1조6510억원으로, 매각 차익은 1조원이 넘는다.  2015년 1월 박종복 SC제일은행장 취임 후에도 구조조정은 이어졌다. 그해 11월 만 40세 이상, 10년 이상 근무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해 당시 5300명이었던 임직원의 18%에 해당하는 규모인 961명이 퇴사했다. 

제일은행의 사명은 2005년 SCB 인수 후 SC제일은행이 됐다가 2012년 1월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새롭게 출발했다. 2016년 4월에는 다시 'SC제일은행'이 됐다. 

 

◆ 앞으로

‘아물지 않은 상처’···이응준씨 "조상제한서 → 신국하우, 몸집만 커져···눈물의 대차대조표 자신있나"

한국이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달러를 2001년 8월 전액 상환함에 따라 IMF 관리 체제는 공식 종료됐지만 대규모 구조조정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대신 이전에는 생소했던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넓혀갔다. 

박조복 SC제일은행장[사진=SC제일행]
박종복 SC제일은행장[사진=SC제일은행]

해외자본에 매각된 SC제일은행장의 박종복 행장은 최근 3연임에 성공했다. 박 행장은 내년 1월 8일부터 3년간 더 은행을 이끈다. 2015년부터 SC제일은행을 이끌어온 박 행장 앞에는 여전히 마주해야 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의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투입되며 회생한 제일은행에 대해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먹튀'와 한국시장 철수설 등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고배당에 따른 국부유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 SC그룹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SC제일은행은 지난해 총 6550억원(배당 성향 208.3%)을 배당했다. 앞서 2018년에는 6120억원 규모의 배당을 실시했다. 

1998년 ‘눈물의 비디오’가 다시금 떠오르는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곳곳에서 구조조정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0월 실업자 수는 102만80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9.0%(16만4000명) 늘었다. 이는 1999년의 10월의 110만8000명 이후 2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눈물의 비디오를 촬영한 이 씨는 " ‘조상제한서’는 ‘신국하우’로 바뀌는 동안 당시 27개였던 은행 중 14개가 사라졌다. 정부는 헐값에 은행들을 해외에 매각하고 통폐합시켰고, 은행원들은 청춘을 바쳐 다니던 직장을 무슨 기준인지도 모르고 하루 아침에 날아든 명퇴 권유서 한 장에 한마디 저항 없이 나가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그렇게 강요하고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해외 선진금융시스템의 도입’ ‘모럴헤저드에 빠진 국내 은행들의 투명성 확보와 국제 경쟁력 제고’, ‘혈세 투입에 대한 뼈 아픈 자성과 자구노력 필요’이 세가지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2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은행은 말없이 떠나야 했던 세가지 이유 중 어느 하나도 시원하게 나아지지 않은 듯 하다.

"해마다 쏟아지는 은행 경영진의 비리와 은행 내 계파주의, 허술한 리스크 관리 시스템으로 인한 대형 금융사고들, 세계 금융계에 내세울 만한 은행 하나 없이 몸집만 커진 국내은행들의 모습들을 여전히 보고 있는 우리는 그 때 흘린 눈물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자신있게 내 놓을 수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눈물의 비디오 속 제일은행 직원들과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이 함께 흘린 눈물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그동안 우리 사회는, 우리 금융은 눈물값이 아깝지 않을만큼 발전한 것일까? 

 

박소연 기자  financial@greened.kr

▶ 기사제보 : pol@greened.kr(기사화될 경우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 녹색경제신문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