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C 판결 인정하라"는 LG…SK는 "영업비밀 침해 검증 안 됐고, 합의금 규모 과도하다"
- 양 사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태도…"분쟁 장기화될 조짐 보여"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간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이 좀처럼 합의 국면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양 사의 태도로 분쟁이 상당히 길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결을 근거로 SK이노베이션에게 백기를 요구하고 있으나,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 침해가 인정된 것이 아니며 과도한 합의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관련 논의를 다뤄온 한 관계자는 “두 회사가 제시하고 있는 조건 간의 간극이 너무 커 타협점이 보이지 않는다"며 "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인다”고 피로감을 드러냈다.
12일 녹색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서로 간의 극명한 입장 차이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 이번 합의의 핵심인 영업비밀 침해 인정 여부와 합의금 규모 중 어느 것 하나도 양 사간의 의견이 일치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다.
앞서 ITC는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판단, SK이노베이션에 배터리 및 관련 부품에 대해 10년간 미국 내 수입 금지를 명령했다.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주장한 11개 범위 내 22개의 영업비밀 침해를 고스란히 인정했다. ITC는 의견서를 통해 “SK는 LG의 영업비밀이 없었다면 10년 이내에 해당 기술들을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증거 인멸에 대해서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못박았다.
ITC 판결로 유리한 입장에 선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에 ‘진정성’ 있는 태도로 합의에 임할 것을 거듭 요구해왔다. 합의금 규모는 영업비밀 침해에 따른 피해와 SK이노베이션의 부당 편취 이득 등을 산정해 2~3조원 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 침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LG에너지솔루션이 제시한 2~3조원 대의 합의금이 너무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SK이노베이션은 ITC의 의견서가 공개된 직후 유감을 표하며 “ITC는 영업비밀 침해라고 결정하면서도 침해됐다는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맞섰다.
이어 SK이노베이션 이사회는 지난 11일 개최한 감사위원회에서 ITC 소송 건에 대해 “문서 삭제에 덜미가 잡혀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제대로 검증해보지도 못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자”며 자사가 미국 사법 절차에 미흡하게 대응했음을 질타했다.
영업비밀 침해가 아닌 대응 부족으로 패소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이사회는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 경쟁력을 현격히 낮추는 수준의 요구 조건은 수용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밝혔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ICT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통해 이뤄진 합의 중 가장 큰 합의금 규모는 1조원 대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를 배 이상 뛰어넘는 금액인 만큼, SK이노베이션은 손익분기점(BEP) 등을 고려해 차라리 미국 사업 진출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곧장 날을 세웠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공신력 있는 ITC에서 배터리 전 영역에 걸쳐 영업비밀을 통째로 훔쳐간 것이 확실하다고 최종결정을 내렸음에도 인정하지 못하는 인식의 차이가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국제적 기준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연방 영업비밀보호법에 근거한 당사의 제안을 무리한 요구라 수용불가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SK이노베이션은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꼬집었다.
양 사간의 분쟁이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유는 양 사가 모두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잇단 화재를 일으킨 '코나 EV' 리콜 비용에 대해 현대자동차와 각각 7:3 비율로 분담할 것을 합의했다. 추정되는 비용만 해도 1조원 이상이다. LG에너지솔루션 입장에서는 이 비용을 SK이노베이션과의 합의를 통해 조달하는 것이 최적의 결과다.
SK이노베이션은 3조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지급하면 사실상 사업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내년까지 배터리 사업에서 손익분기점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만 426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은 더 완강한 태도로 조건을 제시하고 있고,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사업 철수까지 검토하고 있다"며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는 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장경윤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