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철이다.
자리에 따라 연봉도 영향력도 달라진다. 모든 직장인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슈들이 터져 나오는 시즌이 돌아왔다.
7일, 현재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의 시선은 KT 회장 자리로 향해있다. 6만1619명의 직원. 그룹사만 43개에 이른다. KT는 명실공 국내 최대 ICT기업이라 칭할만하다. 그 왕좌를 차지할 게임이 시작됐다. 황창규 KT회장이 오는 3월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을 인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KT 지배구조위원회는 지난 6일 공개모집 및 전문기관 추천을 통해 사외 회장후보자군 구성을 마쳤다. 21명이 공개모집을 통해 후보자로 접수했다. 복수의 전문기관 추천을 받아 통해 9명의 인사도 후보에 올랐다. KT 밖에서 ‘KT회장’ 자리를 노리는 인원만 30명이다.
사내 후보는 7명으로 압축됐다. KT 지배구조위원회는 지난 4월부터 사내 회장 후보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개별 인터뷰 등을 거쳤다.
37명. KT는 이들을 심사해 새로운 수장을 내년 3월 전까지 확정해야 한다.
KT는 “후보자 명예 보호와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정확한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소문이 무성하다. KT출신의 인사들부터, 정부에 연이 있는 인물들까지.
그러나 정작 중요한 KT 회장이 갖춰야 할 ‘덕목’이나 ‘역량’, 혹은 KT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얘기는 비교적 적다. 녹색경제신문은 이에 KT 직원과 재계 인사들에게 ‘차기 KT 회장이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 [편집자 주]
“‘외풍’으로부터 자유로운 회사 환경을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 KT 직원이란 자존심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KT 고위관계자는 녹색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차기 KT회장에게 가장 바라는 역량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복수의 KT 직원과 재계 관계자 등을 종합 취재한 결과, 차기 KT회장에게 바라는 지점은 크게 ‘외풍 차단’, ‘사업의 연속성 보장’, ‘ICT 경쟁력 확보’ 등으로 나타났다.
◇민간기업 KT, 정치권 입김에 ‘흔들’...“외풍 차단 절실”
황창규 KT회장은 ‘황의 법칙’으로도 유명하다. 삼성전자 기술 총괄 사장을 역임하며 반도체를 담당하던 시절, 메모리 용량이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추세를 발표하며 얻은 별명이다.
황 회장이 물러난다는 얘기가 확정된 이후인 올해 3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썩 명예로운 새 별명을 얻었다. ‘Mr. 5G’가 이름 앞에 붙었다. 한국이 지난 4월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한 공로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칭호였다. 통신회사를 이끄는 수장에겐 자랑스러운 수식어일 터다.
그러나 이런 업적을 쌓은 황 회장도 KT가 늘 겪어왔던 ‘외풍’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KT 민영화 이후 최초로 6년 연임 임기를 채우고 회장직에서 물러나지만, 마냥 뒷맛이 개운한 것은 아니다.
황 회장은 올해 1월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포럼)에서 “IT(정보기술)기업을 6년이나 이끈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며 “내년 3월로 예정된 임기 만료에 맞춰 퇴진하겠다”고 일찌감치 예고했다. 이를 두고 외풍을 견디기 고단했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주인 없는’ 공룡 통신기업...철마다 부는 소용돌이
황 회장은 현재 경영 고문 부정 위촉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달 11일엔 자진 출석해 비공개 소환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최근 KT를 3차례 압수수색했다.
KT 새노조와 약탈경제반대행동은 황 회장이 2014년 취임 이후 전직 정치인 등 14명을 경영고문으로 위촉해 20여억원의 보수를 지출하고 각종 로비에 동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3월 황 회장의 업무상 배임과 횡령, 뇌물 등 의혹을 수사해 달라며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재계 관계자는 “황 회장이 기업을 비교적 오랜 시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외풍 차단에 대한 의지도 확고했다”면서 “그러나 원천적으로 외풍을 차단하기엔 그간 쌓아온 정권과 KT의 관계도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현 상황은 확고한 지배구조를 이루지 못하는 KT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황 회장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KT회장직은 지금껏 늘 논란을 끌고 다녔다.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면, KT의 수장도 바뀐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정권 입김에 따라 KT는 흔들렸다.
이번에 황 회장이 연임하지 않는 이유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반 황창규'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정권에서 부는 바람이 거세면 아무리 전문성이 있는 사람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며 “민간 기업이지만, 집권 여당이 KT회장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른 압박이 없다곤 볼 수 없다”고 전했다.
KT는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정부가 지분을 매각해 완전 민영화를 이뤘지만, 확실한 주인이 없어 늘 정권 코드에 따라 ‘낙점 논란’에 휩싸였다. KT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12%)이라 지배구조가 취약해 발생한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대 KT회장들은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중수 전 KT 사장은 수억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석채 전 KT 회장도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딸 등을 부정 채용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 전 사장과 이 전 회장은 각각 2008년과 2013년에 연임을 시도했지만, 검찰조사에 불명예 퇴진했다.
KT 내외부에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황 회장도 지난 2017년부터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지배구조를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정계에서도 “경영을 견제하고 감시할 만한 이사진을 구성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KT가 이번 회장 인사 과정에서 특히 ‘투명성ㆍ공정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KT 이사회는 지난 7월 사외 회장후보군 구성방법으로 공개모집과 전문기관 추천을 받기로 했다. 이사들은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외 회장후보자군 구성을 위해서다.
KT 지배구조위원회는 “최적의 회장을 선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공정하고 원활한 회장 선임 프로세스 진행을 위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사업의 연속성...미래 먹거리 발굴 ‘숙제’
KT는 단순한 통신기업이 아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 5G 네트워크, 자율주행 등 4차산업혁명을 촉진하는 주요 기술을 대거 보유하고 개발하고 있다. 때문에 ‘외풍 차단’만큼이나 ‘전문성’에 대한 요구도 높다.
KT 관계자는 “차기 회장은 한국의 ICT 기술을 이끄는 KT 직원들의 자존심을 지켜줬으면 한다”고 했다.
회장의 자리가 바뀌면 그에 따라 전무급ㆍ부사장ㆍ사장할 것 없이 고위 임원들의 자리가 변경되거나 회사를 나가게 된다. 이른바 ‘물갈이’를 통해 회장 측근이 인사들이 대거 영입ㆍ승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사업은 정지되고, 기업의 방향은 바뀌게 된다.
통상적으로 기업은 10월부터 11월까지 내년도 사업계획을 구상한다. 예산을 편성하고, 미래 먹기를 찾는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KT는 ‘회장 교체’ 국면이라 사업계획 구상이 사실상 ‘올 스톱’된 상황이다.
KT 관계자는 “내년도 사업계획이 구체화될 시기이지만, 사실상 나온 게 없다”면서 “고위 인사들이 분명 ‘물갈이’될 텐데 사업의 연속성을 보장할 수 없어 지금 사업계획을 짜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KT관계자도 “디지털 전환, 4차산업혁명으로 세계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아쉬운 상황”이라며 “회사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답답한 부분이 분명 있다”고 말했다.
KT는 4차 산업혁명에 비교적 탄탄하게 대응하고 있다. 최근엔 기자간담회를 열고 “AI 전문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AI 생활화를 이끌기 위해 4년간 3000억원을 투자하고, AI 전문인력 1000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은 세계의 주요 IT기업들이 주목하는 기술이다. 많은 전문가가 4차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핵심동력으로 인공지능을 꼽고 있다. 구글ㆍ마이크로소프트(MS) 등 IT 글로벌 선두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를 통해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방향성은 잘 잡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지가 관건인 국면이 됐다.
이필재 KT 마케팅부문장(부사장)은 최근 간담회에서 “인공지능은 시장의 대세”라면서 “미래에 어떤 새로운 회장이 오더라도 인공지능 사업에 대한 투자를 줄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연속성은 자동으로 보장된다. 되레 투자가 더 확대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회장이 오더라도 현재 기조가 유지되는 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KT의 수장이라면, 신사업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란 것을 전제한 발언이다.
KT 관계자는 “누가 차기 회장으로 오던 일을 일답게 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정두용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