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소진 속도 조절하며 규제 장기화 대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일본 출장의 원인으로도 꼽혀
삼성전자가 EUV 공정을 통한 반도체 생산량을 지난주부터 크게 축소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8일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에 일차적 대응책으로 EUV(극자외선 노광장치ㆍExtreme Ultra Violet) 공정의 반도체 생산량을 축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라인의 생산을 중단하거나, 가동하더라도 생산량을 줄이는 식이다.
문제는 파운드리 EUV공정이 삼성에서 가장 고부가가치 공정이고 여파가 반도체D램, 낸드플래시D램 등 메모리사업까지 생산축소 및 라인가동 연기 등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이번 조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핵심인 EUV 공정에서 사용되는 포토 리지스트의 재고량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됐다. 현재 삼성은 노광 필수 화학물질인 포토 리지스트 거의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관계자는 녹색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추후 포토리지스트의 공급이 불확실한 만큼 재고 소진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면서 “EUV 공정이 필요한 생산 라인 일부가 중단됐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도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삼성전자 내부에선 이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소재의 재고량을 고려해 생산량을 조절하는 것은 상식적인 조치”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생산량 감축 조치를 통해 일부 라인의 생산이 중단됐을 뿐 아직 전면적인 ‘생산중단’에 들어선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삼성전자의 현재 포토 리지스트의 재고량은 2주에서 4주가량 수준인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일각에선 일본의 규제 발표 이후 추가 확보한 재고량이 일주일 치 수준에 불과하다는 절망적인 전망도 내놓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조만간 공정이 1~2개월 가량 가동을 멈출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만약 이번 일본 수출 규제가 장기화 돼 반도체 공장 설비가 전면 중단될 경우 피해 금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공장 설비는 24시간 가동되는데, 한 번 중단됐다가 다시 설비를 돌리면 수율(합격품 비율)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시 정상치를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실제로 지난해 3월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이 정전사고로 30분가량 작업이 중단됐을 때 발생한 손실액은 5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일주일이 넘게 가동이 중단되면 조 단위의 피해액이 발생하는 셈이다.
또한, 생산량 축소로 납품 일정 연기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신뢰도 하락도 불가피하다. 삼성전자는 7나노 EUV 공정을 적용해 반도체 설계(팹리스) 분야 글로벌 1·2위인 퀄컴과 엔비디아에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GPU(그래픽처리장치) 제품을 공급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이런 상황에 대응해 최대한 해당 소재를 아끼면서, 장기화 우려가 있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힘쓰고 있는 모양새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7일 오후 일본행 긴급 출장에 나섰다. 이 부회장은 현지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사장단 등 임직원들도 비상 근무 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EUV 공정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도약을 위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법이다. EUV는 빛의 파장이 13나노미터(㎚)로 짧아, 기존 불화아르곤(ArFㆍ193㎚) 대비 14분의 1 정도다. 더 미세한 선로를 그릴 수 있어 집적도가 중요한 반도체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아왔다.
삼성전자는 해당 기술을 이용, 지난 4월 7나노 제품 출하 및 양산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7나노 공정이 가능한 기업은 업계 1위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오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달성 목표를 발표한 자신감의 이유도 EUV에서 나왔다. 삼성전자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 중 6조원 이상이 화성에 EUV 전용 라인에 투입돼 올 하반기에 완공될 예정이다.
문제는 이 공정에 사용되는 필수 소재인 포토리지스트를 대부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포토리지스트 전체 수입 중 일본 비중은 91.9%이다. 삼성전자의 EUV 공정에 사용되는 포토 리지스트는 100%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통설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관계자는 “다른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은 일부 대체가 가능할 수 있지만, EUV 공정에 사용되는 리지스트는 현재 단계에서 일본의 제품 말고는 사실상 대안이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부터 포토리지스트,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포괄수출허가에서 개별수출허가로 변경했다. 이번 변경으로 일본 기업은 한국에 해당 제품을 수출할 때마다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관련 법규상 해당 절차에만 최대 90일 가량 소요된다.
포토레지스트는 여러 종류 중 EUV 용에 한정해 규제를 가했다. 현재 더 많이 사용되는 불화크립톤(KrF),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는 규제 대상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를 정조준한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 측은 EUV 공정을 이용한 반도체 생산량 변경 등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면서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고만 설명했다.
정두용 기자 lycaon@greened.kr